주일설교영상

2023-01-15 10:57:14

노창영 목사
잘못된 예배

본문 말씀 : 창세기 4:1-5, 이사야 1:11-13, 마태복음 5:23-26

제목: 잘못된 예배 본문: 창세기4:1-5, 이사야1:11-13, 마태복음 5:23-26 설교자: 노창영 목사

서론// 모든 스포츠 경기에는 타깃(Target)이 있습니다. 타깃은 과녁, 표적, 대상, 목표을 말합니다. 양궁이나 사격 같은 종목은 과녁을 향하여 정확하게 쏴야 메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각종 구기 경기인 축구, 배구, 농구, 골프 등은 볼을 가지고 경기를 하며 볼이 골에 들어가야 점수를 얻게 됩니다. 육상경기도 푯대를 향하여 제대로 달려가야 메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경기에서 열심히 쏘고, 뛰고, 던져도 타깃에 맞지 않으면 그 노력은 모두 헛 것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푯대가 중요합니다. 예배에도 동일한 메시지가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는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예배의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방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한 내용의 요한복음4:21-23절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예배란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헬라어로프로스퀴네세테 토 파트리(προσκυνήσετε τΠατρί), 영어로Worship the Father입니다.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 바로 예배의 타깃입니다. 아버지께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배의 푯대요 골입니다. 과녁을 빗나가는 예배, 푯대를 향하여 가지 못하는 잘못된 예배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목표가 분명한 예배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예배이며 참된 예배입니다.

성경에는 잘못된 예배의 모습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잘못된 예배를 경고하시면서 우리에게 참된 예배의 모습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잘못된 예배에 대해 상고하고자 합니다.

. 잘못된 예배는 자의적(自意的) 예배입니다(4:1-5)

A. 사도 바울이 말한 잘못된 종교의 예배의 특색(2:23)

바울은 골로새서 2:23에서 잘못된 종교의 예배의 특색 3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의적 숭배(自意的 崇拜)

자의적 숭배란 나에게서 나온 예배입니다. 출발점이 입니다. 나의 의도, 나의 마음, 나의 뜻에 의한 인위적 방법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 혼자 열심을 내고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인간중심적, 자아중심적, 자아출발적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잘못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자의적 숭배는 영어성경에 Self-Imposed Worship (자의적인, 자기 뜻을 따르는 예배), 혹은 Will-Worship (자기 의지에 따라 드리는 예배)로 번역됩니다.

허위적 겸손(거짓된 겸손, False Humility)

예배자들은 하나님 앞에 고개도 숙이고 무릎도 꿇고, 겸손히 엎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예배는 성령님의 은혜와 압도적인 임재가 그 사람을 지배함으로 나오는 은혜의 결과로서의 믿음의 순복적인 무릎 꿇음이 아닙니다. 남들 앞에 드러내고 싶은 외식적이고 인위적인 겸손의 겉모양 입니다. 참된 겸손이 아니라 종교적인 겸손의 모양입니다. 이것은 자아에서 나온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 모양(Harsh Treatment of the Body)

예배자가 스스로 몸을 괴롭게 하고 학대함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종교적인 모양새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삼천배를 하고, 묵주를 굴리며, 금욕을 하고, 굶거나 고행을 하면서 자신의 몸을 해치고 괴롭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신으로부터 긍휼과 자비의 마일리지를 얻고자 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이와 같은 형식의 육체적 학대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로워져서 육체를 이기는 승리의 삶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B. 자의적 예배자 가인(4:1-5)

성경은 특히 자의적 숭배라는 잘못된 예배를 드렸던 대표적인 인물 한 사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의 예배입니다.

1. 가인 제사의 문제점

아담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가인과 아벨입니다. 형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였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형 가인은 농사 소출의 첫 소산으로, 동생 아벨은 양을 잡아 어린 양과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만 열납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가인은 분노하였고 얼굴색이 변하였습니다. 가인은 마음에 죄악의 힘이 지배하여 결국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이렇게 인류 최초의 살인은 예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예배가 성공적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 예배자의 인생은 안전히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배를 잘 드린다면 축복과 평강과 안정과 소속감과 행복이 넘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배란 사람의 행복과 저주, 그리고 생과 사를 주관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후에 나타난 가인의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11: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이것으로 그의 믿음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벨은 믿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왜 가인과 그의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했을까요?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을 때 아주 공격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가인은 분노했고, 얼굴색이 변했고, 죄성이 그의 마음을 지배함으로 결국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가인은 왜 이런 반응을 했을까요? 이런 반응은 가인에게 있었던 예배에 대한 기대치 때문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어 그 소출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이를 받아주시고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와 스타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하나님께 묻고 다시 바르게 제물을 드렸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분노했고 얼굴색이 변하였고 그 마음이 죄로 가득 차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입니다. 불평입니다. 결국 가인의 제사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의적 예배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기대치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봉사를 하면서 종교적인 공로를 축적해 나가다가 원하는 인간적 기대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노합니다. 이것은 그 예배자 속에 있는 자아의 열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인은 하나님께 순수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얻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해 주시겠지 하는 나름의 종교적인 축복의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시자 그는 분노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기대감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았기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내 자의로 내 뜻대로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제물을 드리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의 제사의 문제는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가인 자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를 열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받으시고 그 다음으로 제물을 받으십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예물과 기도와 찬양을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와 공로와 행위와 종교적 업적들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하나님께 도전과 반항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종교적 의와 공로를 쌓는 행위의 예배가 되어선 안 됩니다. 결국 이러한 자의적 예배를 드린 가인의 인생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예배드리는 나의 믿음과 나의 자세를 늘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2. 자의적 예배의 파괴적인 결과

자의적 숭배, 자아의 숭배, 자기 중심적인 예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마음의 소원과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께 실망하고 바로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것이 공로주의적, 행위중심적, 자아중심적, 자아에서 비롯된 육의 예배이며 가인적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결과는 파괴입니다. 반대로 아벨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예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과 예물을 받으십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제물을 열납하실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평강과 안정감과 소속감과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행복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우리의 인생은 분노하고 질투하고 화를 내고 죄의 지배를 당해 무너지고 망가져버립니다. 그리고 사람까지 죽이는 최악의 상태까지 가게 됩니다. 예배를 잘못 드린 가인이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배와 살인이 밀접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예배를 통해 얻는 축복은 대단히 크지만 잘못된 예배를 통해 비뚤어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배에는 생사가 걸려 있습니다. 가인과 같은 자의적 숭배가 아니라 아벨과 같은 믿음으로 예배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잘못된 예배는 회개없는 형식적인 예배입니다(이사야1:11-13)

A. 성전 마당만 밟는 형식적 예배자들(1:11-13)

한 번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점점 확장되면서 안산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동안 너무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예배를 많이 드리다 보니 성도들도 예배가 너무 식상해졌고 하나님께서도 이 같은 형식적인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 같다면서 본인의 교회는 마침 코로나19 때문에 단순하게 주일 낮 예배와 새벽예배만 드리게 되었는데 오히려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드린 수많은 예배와 집회들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을까요? 누구를 위한 예배입니까?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드리는가 하는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의 예배를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중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 때 활동했던 남쪽 유다왕국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수양의 번제물과 짐승들의 기름과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그만 가져 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로 인하여 배가 불렀으며 그들이 드리는 수많은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분향을 드리는 것도 가증하고, 월삭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성회를 열어도 악을 같이 행함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은 성전의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민족입니다. 그들은 소, , 염소, 비둘기와 많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엄청난 양의 피와 기름과 제물과 수많은 집회와 모임을 이제 그만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을 드림과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배를 그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악을 회개하지 않는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잘못된 예배입니다.

B. 형식적 예배를 드린 사람들

1. 홉니와 비느하스(삼상2:12-16, 4:1-11)

사무엘상2장과 4장을 보면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둘은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제사장직을 세습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제사장들이었으며 부랑자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그 제물에 자기 몫이 있었습니다.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솥에 삶은 후 제사장들에게 삶은 고기를 넘겨주는데 이것이 그들의 분깃이었습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고기를 삶는 자들에게 가서 억지로 고기의 날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제사를 멸시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했습니다. 아버지 엘리는 두 아들에게 분노했지만 특별한 징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갔다가 법궤를 빼앗기고 함께 죽었고, 아버지 엘리는 그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가장 큰 악행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회개 없는 제사, 회개 없는 봉사, 회개 없는 형식적인 예배는 잘못된 예배입니다.

2. 사울왕(삼상13:1-14, 15:1-23)

사무엘상13장과 15장에는 사울왕의 실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지파의 사람이었고 처음에는 겸손했던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의 멘토였고 그를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잘못된 길로 나갔습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한 불법적 제사(삼상13:1-14)

이스라엘이 블레셋와 큰 전쟁을 벌이던 때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일주일 뒤에 올 것이니 그때까지 전쟁에 나가지 말고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일주일이 지나도 사무엘 선지자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점점 공격하려고 쳐 들어오고,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 사울 왕을 바라보는 백성들은 점점 흩어지고 마음이 나약해졌습니다. 조급한 사울 왕은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본래 제사는 제사장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제사를 드렸고 제사를 마쳤을 때에 사무엘이 나타났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며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드리는 것,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불순종한 모습(삼상15:1-2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대적은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 싸울 때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아말렉의 왕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윤택하고 가장 좋은 것은 살려 두고 가치 없고 낮은 것들만 진멸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와서 자신의 귀에 들리는 양과 소의 소리가 무엇인가를 묻자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가장 좋은 제물을 살려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며 불순종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그를 책망했습니다. 결국 제사를 멸시한 사울 왕에게는 악신이 틈타게 되었고, 사울 왕은 무당까지 찾는 악행까지 저질렀으며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이 드리는 제사, 순종 없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께서는 제물 속에 담겨진 우리의 순종과 마음과 순전함과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 없는 예배와 제물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 없는 예배, 순종 없는 예배, 삶이 없는 예배는 마당만 밟는 예배이며 무용지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가 할례받고 십자가에 죽고 회개한 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 제사를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회개가 있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열납 되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잘못된 예배는 화해 없는 예배입니다(마태복음5:23-25)

화해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화해와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가 같이 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잘못되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간의 관계 속에서 마음의 응어리나 어둠이 없는 순전한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A. 기독교의 참된 예배는 예배형식보다 관계가 우선입니다

예물은 영어로 Offering(예물, 헌금, 제물)이라고 합니다. 구약시대 때는 제물을 동물 혹은 곡식으로 드렸고, 신약시대 때는 역시 동물이나 가치가 있는 화폐로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릴 때는 예물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기억나면 제물을 제단에 놓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돌아와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예배형식 우선의 예배가 아니라 관계우선의 예배입니다. 멋진 예전과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은혜로워 보이는 예배가 있어도 실제로 그 예배가 화해없는 예배라면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B. 화해의 실천에 대하여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들의 모습이 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분의 삶에 들어가 보면 부부사이와 자녀사이와 부모사이와 직장동료과 성도들 사이에서 각종 원한과 맺힘과 응어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살면서 피차 상처를 주고 받고 살아갑니다. 한 번은 제가 목회자 세미나 때문에 제주도를 가게 되어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 옆에 타신 목사님께서 제주도를 보면서 바다도 좋고 경치도 좋고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한라산도 보이고 그림 같은 집도 보이는데 나도 저런 천국 같은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우리가 실상 아름다운 천국 같은 저런 곳에 현미경 끼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싸움과 갈등이 있고 불평과 욕이 있고 비난과 거짓말과 사기와 살인이 있으며, 우리는 이 같은 인간들을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한마디 했습니다. 자연은 좋고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합니다. 무언가 2% 부족합니다.

외국의 어떤 은퇴하신 목사님 가정에 아주 친한 몇 가정이 모여서 함께 티타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함께 대화하던 중에 한 장로님이 여러 사람 앞에서 부인 권사님을 약간 면박을 주고 야단치는 말을 하니 그 부인 권사님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나가버렸고 결국 이혼을 하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한 자리에서 함께 예배드리며 누가 봐도 아름다워 보이는 장로와 권사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실상 남편은 평생을 살면서 부인을 구박했고 괴롭게 했지만 부인은 권사니까 참았던 것입니다. 이 일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에 무언가 누적된 스트레스와 분노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수십 년간 예배의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지만 부인의 마음에는 남편에 대한 커다란 응어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날 폭발하였고 그 가정은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 부부가 예배드린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는 형식이 아닙니다. 자리에 앉아 있다고 예배가 아닙니다. 서로 간의 응어리가 풀어지고 원한과 갈등이 녹아져 내리고 화해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화해없는 예배자의 예배는 잘못된 예배입니다.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잘못된 예배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의적 숭배 같은 자기 중심적 예배, 회개 없는 형식적인 예배, 화해 없는 껍질의 예배를 버려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 참되게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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