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8월 첫째주(8월04일-8월09일) 금주가정예배
2025-07-31 14:33:38
방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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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만나(가정예배)

 

804일 찬송/ 82(95) 본문/ 예레미야36:1-19 제목:기록된 말씀

사람은 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는 법이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을지라도 예레미야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바룩을 통해 선포되어 널리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낭독하여 모든 백성에게 들리니라이 때 낭독된 말씀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을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에 의해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구전적으로 전하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기록하여 낭독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의 권위를 그대로 세우려하십니다. 바룩에 의하여 전하는 바가 바룩 자신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예레미야의 권위에 의존하도록 하십니다. 기록하도록 하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의 권위는 그것을 선포하는 일반인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록한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도들의 권위에 의존된 전도문서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를 전하는 권위에 의존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805일 찬송/ 102(94) 본문/ 예레미야36:20-32 제목:성취되는 하나님의 말씀

종국에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겨울 궁전에 있는 여호야김의 왕에게 들려지게 됩니다. 재앙과 멸망의 말씀을 들은 왕과 그 신하들은 놀랍게도 두려워하거나 애통한 마음이나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한 조각 한 조각씩 화롯불에 태워버립니다. 그러나 두루마리가 왕에 의해 불태워졌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록하도록 하십니다. 교만함에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불태웠으나 그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한 종이를 태운다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된 재앙의 말씀은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 한 반드시 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히듯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한다(이사야55:10-11)’고 하셨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다르고 사람의 길과도 전혀 다른 길을 내시는 하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믿을 때 더욱 깊은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비한 심령으로 다가가 은혜 받으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806일 찬송/ 265(516) 본문/ 예레미야37:1-21 제목:참 자유함

본문은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승리를 예언하다가 감금되기까지 하며 이런 중에 시드기야의 유약한 행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야김을 이어 왕이 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기도해 주기를 청하는가 하면 애굽과 바벨론으로 어려움에 처한 국운(國運)으로 토굴 속 음실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된 예레미야를 불러 왕궁에서 비밀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시드기야의 이러한 행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두려운 마음과 우유부단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를 비밀히 면회하는 것을 보아도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둣한 그의 유약함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육적 감금으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시드기야였습니다. 시드기야는 죄악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과 달리 마음과 심령이 갇혀있는 자입니다. 예레미야는 몸은 감금되어 있으나 그의 예언은 상황에 변하지 않고 바벨론의 승리와 하나님의 뜻이신 투항을 선포하는 자유자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중에도 자유함을 누렸던 바울은 복음 안에 참 자유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 복음 안에 참 자유가 있음을 믿으시고 심령의 자유로 참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807일 찬송/ 340(542) 본문/ 예레미야38:1-13 제목:신앙의 진보

시드기야 왕은 방백들의 상소에 따라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감금시키는 일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다시 감금된 예레미야는 십중팔구 굶어 죽게 될 것이라는 한 환관의 호소에 예레미야를 풀어주도록 합니다. 곤궁한 때에 굶어 죽게 된 예레미야는 한낱 환관에 의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환관은 구스 사람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부패하고 악한 방백들은 예레미야를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으로서 방백들을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라고 정죄하며 예레미야를 구출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이 횡횡하는 때에 신앙적인 독보를 걷는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종교를 일찍이 가지고 있음에도 그대로 믿지 아니한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결국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가 유대인들에게보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혜택이 더욱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받았으나 교만하여 순종치 않은 자는 빼앗기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자된 자가 나중되는 말씀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앙에 부지런함으로 신앙의 진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808일 찬송/ 137(251) 본문/ 예레미야38:14-28 제목:결단력 있는 신앙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몰래 다시 만나 확실히 하나님의 계시를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의 본심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순종하려는 마음보다 한 가닥의 위로의 말을 듣기를 원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예레미야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바벨론에 항복할 때 당할 조롱과 비웃음을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시드기야인 것입니다. 신앙에는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세상을 섬기든지 해야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성도들은 과감한 신앙적 결단을 내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항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으로 결단력있는 신앙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809일 찬송/ 483(539) 본문/ 예레미야39:1-18 제목: 죽으면 사는 삶

세상은 비록 아침저녁으로 변하나 하나님의 계획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아 말씀하신 예언대로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는 본문의 장면입니다. 멸망당하지 않고 죽음을 면하기 위해 얘를 쓰며 인간적인 방법을 썼던 시드기야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듯 하며 예레미야에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했던 시드기야는 방백들의 요구에 예레미야를 내어주면서 시위대 뜰에 갇히는 것을 방조합니다. 바로 앞의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두려워하여 한 행동이었습니다. 반면 구덩이에 갇히고 굶주림의 위협과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던 예레미야였습니다. 마치 시드기야가 살고자 하였으나 예레미야는 죽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살리라(9:24)’ 복음의 역설을 기억하셔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버리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작성: 방선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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