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영상

2021-04-11 08:56:05

노창영 목사
나사로의 부활 강해(Ⅱ):장례,아쉬움,그리고 고백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1:17-37

제목: 나사로의 부활 강해():장례, 아쉬움, 그리고 고백 본문: 요한복음 11:17-37 설교자: 노창영목사

서론// 하나님께서 복된 주일 아침에 말씀으로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나사로의 부활 강해 두 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만나시기 위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로의 장례식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나사로의 장례를 둘러싼 내용을 가지고 설교하겠습니다.

. 먼저, 나사로의 장례식에 나타난 그의 평판을 상고하겠습니다(17-19,33-35)

A. 사람의 평판은 그의 장례식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평소에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의 평판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장례식은 그 사람의 평판을 나타내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살았으며,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큰 장례식은 야곱의 장례입니다(창세기50). 야곱은 130세에 아들 요셉의 생존 소식을 듣고 애굽으로 가서 17년간 요셉의 부양을 받고 행복하게 살다가 147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애굽의 국무총리였던 아들 요셉으로 인하여 야곱의 장례는 크고 화려하게 거의 국장급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야곱의 시신은 애굽의 장례 문화에 따라 40일간 향재료를 시신에 넣고 염습을 하게 되었고, 70일간 야곱을 위하여 애곡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유언에 따라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에서 장사하기 위하여 옮겨갈 때에, 바로 왕의 모든 신하들과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들과 요셉의 형제들과 아비집의 가족들이 동행합니다. 그들은 요단강 건너편 아닷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7일을 애곡하였고, 그 애곡의 소리가 너무 커서 그 지역 거민들이 그 땅을 아벨미스라임(애굽인의 큰 곡함)이라 불렀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죽었을 때에는 이스라엘 온 족속이 30일을 애곡합니다(20:20). 모세가 죽었을 때에도 이스라엘 온 족속이 30일간 애곡합니다(34:8). 이스라엘 백성들이 30일간 애곡을 했다는 것은 아론과 모세를 크게 여겼고 존경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다의 성군 히스기야 왕이 죽었을 때, 그 시신을 다윗 자손의 묘실 중 가장 높은 곳에 장사하여 히스기야의 죽음에 존경을 표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역하32:33). 히스기야에 대한 아름다운 평가입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다릅니다. 웃시야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강성해지자 웃시야는 점점 교만해 졌고,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의 고유권한인 분향을 하려고 할 때, 이마에 문둥병이 발생합니다. 웃시야는 문둥병으로 인하여 죽을 때 까지 별궁에서 지내다가 죽게 됩니다.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그는 문둥병자라서 열왕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묘실에 접한 땅에 묻힙니다(역하26:23). 사도행전9장에 욥바에 살고 있던 다비다라는 여제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평소에 선행을 베풀고 구제를 많이 하였습니다.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을 때, 제자들이 욥바 근처의 룻다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에게 와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했을 때에 다비다의 시신은 다락에 뉘여 있었고, 모든 과부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비다가 평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고 나서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외치니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결국 죽음은 그 사람의 평소의 삶과 행실을 평가하는 증거입니다.

B. 나사로의 장례식에 나타난 그의 평판

많은 조문객의 숫자(17-19)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살던 곳은 베다니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15스타디온(1스타디온81m, 2.7Km) 떨어진 마을입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찾아와 조문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 중에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인근 주민들도 있었습니다. 베다니라는 작은 촌에 죽은 사람을 위해 많은 유대인이 조문을 왔다는 것은, 나사로가 평소에 덕을 행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눈물(33-35)

장례식을 가보면 뭔가 냉냉하고 눈물이 없는 장례식이 있습니다. 이런 장례식은 가족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없습니다. 가족 간의 관계가 좋지 못하고, 죽은 이가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눈물을 흘렸으며, 조문을 온 많은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기록이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입니다(26:36).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입니다(26:37). 마지막으로 나사로가 죽었을 때입니다(35). 예수님께서는 완벽한 신이신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심성과 감성과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눈물은 나사로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마음이며, 고통의 표현이고 이별의 슬픔의 표시입니다. 조문객의 숫자, 조화의 숫자, 빈소의 크기와 규모, 관의 두께, 묘지의 크기, 납골당의 수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애정, 사랑, 섭섭함, 눈물이 그 사람의 평소에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나사로 죽음을 향한 사람들의 눈물은 나사로가 평소에 많은 선행을 베풀며 살아갔음을 보여줍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아름다운 평판이 있는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습니다.

.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에 베다니에 오신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봅시다(21,32,36-37)

A.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지 않으심에 대한 아쉬움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오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4)이 지난 후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32)”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라고 이야기 합니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 만일 베다니에 계셨더라면 병에 걸려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의 표현입니다.

B.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생각

이들의 아쉬워하는 말속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공간적 한계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멀리 계셨기 때문에 나사로를 치료하지 못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간적 한계를 뛰어 넘으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 있기 때문에 치료하지 못하시고, 가까이 있기 때문에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요한복음 4장의 기록은 예수님의 공간을 뛰어넘는 치료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계실 때,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와 가버나움에 있는 병든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왕의 신하가 믿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다 자신에게 오는 하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인들을 만난 왕의 신하가 아들이 살아난 시간을 물어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치유된 시간은 예수님께서 살았다라고 선포하신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계셨지만 가버나움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은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하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찾아와 예수님께 중풍병에 걸려 시달리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겠다고 말씀하시니, 백부장은 주님께서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믿음의 말을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시로 하인이 즉시 치료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요단강지경에 계셨습니다. 나사로는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계신 곳과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까지는 약32~40Km정도의 거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든 것을 아시고도 이틀이나 지체하신 후에 나사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지경에서도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성과 경험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시며,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성과 사고와 생각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이전에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살된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같은 유명한 부활사건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능력이 남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자신의 오라비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보다는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만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으로만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료와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시야가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성과 지성을 뛰어넘는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눕니다(고전2-3). 첫 번째는 푸쉬코스(Ψυχικς), 육체에 속한 사람, 자연인 (The Natural Man)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영적 장님들입니다. 두 번째는 살키코스(σαρκικος), 즉 육신에 속한 사람(The Man of Sinful Nature)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가졌어도 온전히 눈이 열리지 못하고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젖먹이와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ς), 즉 영에 속한 사람, 신령한 자(The Spiritual Man)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고, 영적으로 판단하고, 영적으로 분별하는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은 살키코스에 해당하는 육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아의 갑각류의 껍질을 깨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작은 자아의 껍질 속에 가두어 두면 안됩니다.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을 뛰어넘어 영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적 특성을 분석해 봅시다(22-27,28-33)

A. 두 사람의 신앙적 특성과 차이점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였지만 서로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에 대하여

마르다는 활동적(Active)이고, 사람을 좋아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여성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집에 모셨을 때 그녀는 여러 가지 접대를 하는 일로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10, 12).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 먼저 마중나온 사람은 마르다였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집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치 베드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처럼 착하고 사람은 좋은데 성격이 급하며 행동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하여

마리아는 소극적(Passive)이고, 내성적인 여성입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dml 발앞에서 말씀을 들었고,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에 부어드린 여인입니다. 그녀는 조용한 집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때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을 마중 나갔을 때도 자신은 집에 있었고 예수님께서 부르시니 그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리아는 마치 사도 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요한은 예수님 품에 의지했고, 예수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도 옆에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요한과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B. 위대한 선언, 위대한 고백

위대한 선언에 대하여(25-26)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선언과 위대한 신앙고백은 마르다를 통하여 나옵니다. 성경에서 마르다는 조연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동생 마리아는 늘 예수님 옆에 있었고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장 위대한 선언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도록 만든 위대한 선언의 유발자는 마르다였습니다. 주인공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가 아름다운 사고를 친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말씀 그대로 죽은 나사로를 지금 다시 살려 내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통하여 부활을 능력을 지금 나타내려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이 말씀을 오해하여 자신의 오라비가 지금 살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라고 고백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지금이 아니라 나중 마지막 부활 때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르다의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말씀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의 생명의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I AM STATEMENT”(나는의 선언)을 살펴봅시다. 이는 나는 생명수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선한목자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등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수님의 선언의 크라이맥스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 되신 생사의 주관자 되심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사도신경의 핵심고백이 무엇입니까? 바로 몸이 바로 사는 것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보여주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교리이며,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선언입니다.

위대한 고백에 대하여(27)

이 같은 예수님의 선언 앞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라고 고백합니다. 마르다의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즉 왕의 왕이시며, 세상에 오시는 종말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이심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핼라어로 에고 페피스튜카(ἐγπεπίστευκα)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는 내가 믿습니다(I believe)라는 마르다의 고백입니다. 이는 마르다 자신의 신앙이자 간증입니다. 믿음은 나의 고백입니다. 나의 간증, 나의 노래, 나의 소망입니다. 내가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몸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부활과 생명의 말씀을 믿고 부활의 소망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아름다운 행실의 삶을 살고, 자아의 껍질이 깨어져 하나님의 세계에 눈이 열리고, 부활과 영생의 확신으로 살아가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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