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영상

2021-09-12 08:44:08

노창영 목사
디도서강해(Ⅱ):전도의 사명과 디도의 호칭

본문 말씀 : 디도서 1:3-4

2021.9.12 설교요약

제목: 디도서강해():전도의 사명과 디도의 호칭 본문: 디도서 1:3-4 설교자: 노창영목사

서론// 지난 주일부터 디도서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1-2절을 강해하면서 사도 바울이 내가 하나님의 종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한 자들의 믿음, 진리와 지식의 말씀, 영생의 소망으로 된 것임을 설교하였습니다. 오늘은 3-4절의 말씀을 강해하겠습니다.

.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하여 말씀합니다(1:3a)

1절부터 4절까지는 서론부분으로 주로 바울이 디도를 향하여 주는 인사말, 문안과 축복의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핵심적인 신학과 사상이 담겨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3절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보여주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A. 바울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이 본문에서 정확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의 핵심이 빠지면 기독교와 교회가 존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의 존재도 없음을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의 근거가 거짓 없으신 참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영생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증거하며 외치고 믿고 있는 이 진리의 핵심은 이 영생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말씀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전도로 나타내셨고 내게 맡겼다는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진리와 가르침들이 있지만 가장 궁극적인 기독교 교리와 진리의 핵심은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나는 생명의 떡,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영생을 먹으라, 가지라, 소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가장 궁극적인 핵심이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바울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기독교교리의 최고봉은 바로 영생을 주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이 본문은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자신이 이 사명을 맡아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생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소유하고 있어야 할 우리의 중심적 신앙의 주제가 됩니다. 바로 자기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일 아침 예배 시간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에 내용은 크게 8가지입니다. 8가지는 또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삼위일체이신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같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초반부를 이루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은 거룩한 교회와 성도들의 교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세 가지는 죄를 용서받는 것, 몸의 부활, 그리고 영생입니다. 이 마지막 세가지는 기독교 신앙의 엑기스입니다. 이것을 내가 갖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하고, 선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존재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침례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던 음악교수 정두영목사가 만든 노래입니다. 오래 전에 이 노래가 공전의 대히트를 치니까 세시봉시대에 노래하던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한 가수가 정두영목사를 찾아와서 좋은 곡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수에게 정두영목사는 자신이 근래에 작곡한 노래를 보여주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서로 사랑해요 서로 사랑해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이 서로 사랑해요 서로 사랑해요 내가 너희를 서로 사랑했듯이... 다 같이 이 떡을 나누어요. 이 떡은 나의 나의 몸이니, 다 같이 잔을 드세요. 이 잔은 나의 피니...” 세시봉 출신의 그 가수는 이 노래를 듣고 곡조는 정말 좋은데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두영목사에게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목사님 이 가사 중에 살과 피는 빼면 좋겠습니다. 그 가사는 대중성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 말에 한 성격하시는 정두영목사는 이 가사에서 살과 피를 빼면 기독교는 뭐가 남니? 그 가사를 빼면 이 노래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면서 야단치고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그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불러서 극동방송 복음성가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됩니다. 그 가사에서 살과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 것이 빠지면 이 노래는 인간의 사랑 노래, 연애감정이 담긴 에로틱한 노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죄의 용서와 몸에 부활과 영생을 빼낸다면 우리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란 죄 용서에 대한 확신입니다. 몸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영생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 때문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의 핵심인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회를 들락날락할 수는 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죄가 용서되었다는 확신, 언젠가 육신이 깨어지고 죽게 되지만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실 때 몸의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놀라운 역사적인 미래의 소망, 그리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소유, 이것이 기독교의 모든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것이므로 바울은 거짓 없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영생을 하나님께서 전도로 나타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영생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절대로 놓치면 안됩니다. 그것을 소유하셔야 합니다.

B. 하나님께서는 이 영생의 말씀을 자기의 때에 전도로 나타내셨습니다

1.자기의 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이 영생의 말씀을 자기의 때에 전도로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기독교의 계시는 그냥 존재만 하는것이 아니라 나타나야합니다. 드러나야 하고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때, 즉 하나님의 때에 나타난 것입니다.「자기의 때(In His Own Time), 곧 하나님의 시간에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때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는 시간을 말하는데 카이로스(Καιρς)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이라는 말의 두 개념이 있습니다. 크로노스(Κ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ς)입니다. 크로노스는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입니다. 흘러가는 연대적 시간을 말할 때 크로노스라고 말하지만, 어떤 역사적인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는 시간을 말할 때 카이로스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신 그 때, 바로 그 시간은 카이로스,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나타나 전도를 시작하신 그 역사적인 시간의 출발점이 바로 하나님의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때입니다.

에스더에는 부림절이 나옵니다. 이 날은 아말렉의 후예인 하만이 페르시아 임금의 총애를 받는 국무총리였는데 그가 싫어하는 유대 민족을 죽이려고 하는 집단대학살의 명령을 내린 그 날을 말합니다. 제비를 뽑아 그 날을 정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이 다 죽게 생겼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역전시켜 하만은 장대에 달리게 하시고 아말렉과 원수들이 모두 다 죽임을 당하는 날로 변화시키십니다. 이 날이 부림절입니다. 역전극이 벌어진 날입니다. 이 같은 날을 우리는 카이로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홍해바다 앞에 섰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로 막혀 있고 뒤로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옵니다. 백성은 이 사이에서 원망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홍해바다가 갈라지게 하셔서 바다가 육지가 되어 건너게 하시고 바로의 군대를 수장되고 맙니다. 이 결정적인 날도 바로 하나님의 카이로스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결정적인 성육신의 그날, 영원한 말씀이 이 땅에 육신으로 나타난 그 날을 우리는 카이로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영원한 말씀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은 영생의 말씀이 선포된 시작이었습니다.

2. 말씀이 전도로 나타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전달되는 방법은 전도입니다. 헬라어는 케루그마(κηρύγμα)인데, 기독교 복음 진리의 선포(Proclamation)를 말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가 설교나 전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나타나야 합니다. 노출되어야 합니다. 공개되고 알려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부딪혀서 받아들이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방법 같아 보이지만 진리가 전도(κηρύγμα)를 통해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영생의 말씀은 감춰질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노출되고 공개되고 열려져야합니다.

열왕기하 7장에 보면 아람왕 벤하닷이 모든 군대를 끌고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점령하려고 에워싸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같은 상태가 계속되어 성안에 백성들 가운데 먹을 것이 없게 되어 너무 굶주려서 자기들의 아이들의 인육을 서로 먹습니다. 그 정도로 끔찍한 상황중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 때에 문둥병자 넷이 사마리아성 어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 안에 들어간다 해도 다 주려 죽는 상황이고 여기에 있어도 굶어 죽을 테니 차라리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아람군대에게 항복을 하리라고 결심합니다. 이들이 죽으면 죽겠다는 마음으로 아람군대의 진영으로 들어가니 아람군대진영이 모두 비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헷사람의 용병들과 아람군대 용병들이 사마리아를 도우러 왔다고 착각하도록 아람군대가 말소리와 군대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모든 아람 군대는 그 소리를 듣고 다 도망갔습니다. 이 후에 그 문둥병자 네 명이 왔을 때는 이미 아람 진영은 다 비어 있었습니다. 굶주리던 문둥병자들은 맘껏 먹고 마시고 즐기고 배부르게 하고 거기 있던 금과 은, 의복들을 다 숨기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소위가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들은 저 성안에는 굶주려 죽는 백성이 많은데 우리가 이 아름다운 소식을 가서 외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지 모른다라고 말하면서 성에 가서 아람군대가 도망쳤다고 하는 기쁜소식, 복음의 소식을 외칩니다. 복음은 가지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나만 소유하면 안됩니다. 기쁜 소식은 함께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가 도망간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남긴 음식이 있으니 먹고 마시고 살라고 하는 복음의 외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란 행실, 삶의 표현이 아니라 입술의 증거입니다.

어느 60대에 늦게 예수님을 믿은 분이 자신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왜 진작 이 기쁨의 소식을 나한테 말하지 않았느냐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믿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한탄을 하더랍니다. 그에게 전도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목사, 장로 등 예수님을 믿는 친구들이 기도는 많이 했지만 정작 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잠잠히 계시면 안 됩니다. 외쳐야 합니다. 말해야 합니다.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생의 말씀은 전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8에 보시면 하늘의 천사들이 한밤중에 환한 빛 가운데 베들레헴 지경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말합니다.「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이 놀라운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달려가 주님의 탄생을 확인하고 찬양하며 노래하며 외칩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은 온 인류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나타나야만 합니다. 욥기 32장에 보면 엘리후는 욥과 빌닷, 소발, 엘리바스 세사람이 고난의 문제 때문에 서로 싸우고 영적 전쟁을 벌일 때 마지막에 나타나서 말합니다. 나이든 노인들이라고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내가 비록 젊지만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강박하시니 내가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 죽겠다고 합니다. 또 내 가슴이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부대가 터진 것 같다고 합니다. 이 엘리후처럼 우리 안에는 말 안하면 안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생의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도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내가 말하지 않고는 내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터지는 씨앗이 되어 외적으로 터져나가는 폭포수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전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 바울은 이 전도가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을 따라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1:3b)

A. 전도의 놀라운 가치

바울은 이 전도가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인 영생의 진리가 하나님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시작되어 그것이 전도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전도는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따라 내게 맡겼다는 것을 강조하고 확신하며 말씀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전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감입니다.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다 똑같은 무게가 아닙니다. 차관보다는 장관의 말이 무게가 있고, 국무총리 보다는 대통령의 말이 무게가 있습니다. 연대장보다는 사단장이, 전무보다는 사장의 말이 무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위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겨졌기 때문에 그 권위의 무게로 인하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하신 분은 우주의 왕이시요, 우리의 총사령관이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구주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내리신 명령을 따라 바울이 이 위대한 가치의 전도사역을 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의 한 산에 열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에 이 권세로 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주 하나님의 명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따라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갖고 있는 전도의 사명은 이 같은 구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최고의 권세의 가치를 지닌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내게 맡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찬송가 204장은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라고 고백합니다. 구주 예수를 믿는 것, 믿음은 나의 간증, 나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나의 일, 나의 임무, 나의 책임, 나의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이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바울은 전도의 사명을 맡아 이를 평생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사도행전 13~20장까지의 내용은 바울의 1,2,3차 전도여행을 기록합니다. 주로 소아시아 지역과 헬라 지역에서의 복음 증거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0~28, 그리고 바울서신에 많은 기록들은 바울이 로마까지 가야겠다는 땅끝 전도의 열망으로 가득차 있고, 이는 이 한가지 복음전도의 열망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갔던 바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페르시아의 왕후 에스더는 대적 하만에 의해서 유대 민족이 다 죽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그 내용은 왕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유대민족의 살길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에 있는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했던 에스더는 자신을 위한 금식기도를 부탁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왕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자리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복음 전도를 감당하도록 맡겨진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 바울의 축복의 인사와 전도사역의 산증인에 대하여 선포합니다(1:4)

A. 바울이 디도에게 주는 최고의 축복의 선물

본문의 1:4 하반절은 바울이 디도에게 보내는 축복의 문안인사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선포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원, 우리의 영생, 우리의 삶, 우리의 교회생활, 우리 가정의 결혼과 자녀, 우리의 사업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증거는 바로 평강입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색은 마음에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입니다. 요한복음 14:27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근심과 두려움이 없어지는 평강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의 선물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두 가지입니다. 이 축복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로부터 좇아 디도에게 있기를 원하는 바울의 선언이 기록됩니다.

B. 이 서신의 수신자 디도의 호칭: 바울의 전도사역의 열매

1:4상반절에서 바울은 디도에 대해 이렇게 수식합니다.「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라」. 디도의 부모는 유대인이 아닌 헬라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할례자였지만 기적적으로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디도는 영어로 타이터스(Titus)로 아주 흔한 라틴식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 자체는 존경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한국의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같이 아주 보편적인 이름입니다. 이 디도를 향해 바울은 너와 나는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믿음의 공동체안에서 같은 신앙을 소유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성령님, 같은 세례, 같은 믿음을 공유합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회 등 여러 교파가 있지만 개신교의 기본적인 신앙의 교리는 거의 비슷합니다. 우리는 같은 신앙고백위에 서있는 어떤 교회를 가도 마음이 편안하고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 가르치는 이단이나 거짓 분파,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우리와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디도는 바울을 통해 같은 믿음안에서 복음을 받은 참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사역의 열매와 산 증거가 바로 디도입니다. 바울은 디도를 같은 믿음을 따라 된「나의 참 아들(My True Son)」이라고 부릅니다. 아들이라는 것은 바울과 디도가 영적 친자관계라는 것입니다. 피가 섞인 혈육은 아니지만 같은 영적인 DNA를 공유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디도를 소개할 때 그는 나의 형제요(고후2:13), 그는 나의 동무요, 동역자(고후8:23)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아름다운 성경적인 관계의 그림은 그가 나의 참 아들이라는 영적 친자관계입니다. 디도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세상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내가 너희를 복음으로 낳았다(고전 4:15)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단순히 그들의 선생, 멘토, 상담자, 인도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과 디도에게 복음안에서 생명을 준 아버지였습니다. 이것이 전도 사명을 맡은 바울의 산증거와 열매인 디도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영생의 복음을 믿고 이 복음을 전도로 증거한 많은 열매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그에게는 참 아들된 디도가 있었습니다. 디모데도 있었습니다. 마가요한과 에바브로디도도 있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생명을 낳는 사역, 생명을 만들어 내는 영적 복음의 재생산의 사역을 바울은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결론// 바울은 기독교 교리의 최고봉이 영생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생의 말씀은 전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인데 그 사명을 하나님께 내가 받았으며 그 열매가 바로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임을 보여줍니다. 성도여러분, 영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의 사명을 내게 맡기셨다고 믿고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사역을 통하여 디도와 같은 신앙의 자녀들을 많이 만들어 내시기를 바랍니다.

(설교요약: 강퐁이목사)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제목 설교일 성경말씀 설교자 첨부 파일 조회수
664 예수님께 드리는 선물 2025-04-20 요한복음 11:38-44 김창근 목사(무학교회 원로) 36
663 무엇을 쫓고 계십니까? 2025-04-13 요한복음 12:12-19 이동철 목사 42
662 얼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 2025-04-06 사도행전 6:15,7:54-60 손호송 목사 58
661 문턱에서 2025-03-30 누가복음 2:1-7 이일호 목사 73
660 예수의 흔적 2025-03-23 갈라디아서 6:14-17 정영택 목사 77
659 말씀에 의지하여 2025-03-16 누가복음 5:1-11 김환태 목사 77
658 가장 위대한 꿈을 찾자! 2025-03-09 사도행전 1:6-10 윤병수 목사 94
657 품질보증(品質保證) 2025-03-02 베드로전서 2:7-10 이동철 목사 97
656 사십주강해(Vll):십계명(4):제7·8계명 2025-02-23 출애굽기 20:14-15 노창영 목사 81
655 사십주강해(Vl):십계명(3):제5·6계명 2025-02-16 출애굽기 20:12-13 노창영 목사 99
654 사십주강해(V):십계명(2):제3·4계명 2025-02-09 출애굽기 20:7-11 노창영 목사 97
653 사십주강해(Ⅳ):십계명(1):제1·2계명 2025-02-02 출애굽기 20:1-6 노창영 목사 110
652 사십주강해(Ⅲ):사도신경(3)-죄용서·몸의 부활·영생 2025-01-26 요한일서 1:9,로마서 6:6, 고린도전서 15:44,요한복음 5:24 노창영 목사 103
651 사십주강해(Ⅱ):사도신경(2)-성령님·교회·교제 2025-01-19 고린도후서 13:13,요한복음 14:26,고린도전서 1:2, 에베소서 4:2-3,12 노창영 목사 113
650 사십주강해(Ⅰ):사도신경(1):-성부·성자 2025-01-12 이사야 45:18,마태복음 6:31-32,빌립보서 2:5-11,베드로후서 3:14 노창영 목사 99
1 2 3 4 5 6 7 8 9 10 ... 45